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(문단 편집) === 가문 === 리키니우스 씨족은 [[플레브스]] 중에서 가장 성공한 축에 속하는 가문이었다. 기원전 494년 [[성산 사건]]이 발발한 후 플레브스의 권익을 보호하고자 도입된 [[호민관]]에 처음으로 이름을 올렸고, 이 가문에 속한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칼부스 에스퀼리누스가 [[파트리키]]의 전유물이었던 [[집정 무관]]에 플레브스 출신으로서 2차례(기원전 400년, 기원전 396년) 선임되었으며, 기원전 364년에는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칼부스가 가문 최초로 [[집정관]]에 선출되었다. 이후 리키니우스 가문은 고위 행정관에 여러 차례 이름을 올리며 [[노빌레스]]로 거듭났다. 리키니우스 씨족의 지파인 크라수스 가문은 [[폰티펙스 막시무스]](기원전 212년), [[기병장관]](기원전 210년), [[감찰관]](기원전 210년), 집정관(기원전 205년) 등을 역임한 [[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디베스(기원전 205년 집정관)|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디베스]]를 시작으로 뛰어난 인재들을 배출하면서 리키니우스 씨족 중 가장 유력한 집안으로 거듭났다. 마르쿠스의 증조부인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는 기원전 171년 집정관을 맡아 [[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]]에서 로마군을 지휘했고, 조부인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는 기원전 127년 또는 126년에 법무관을 역임했다.[* 이 인물은 항상 우울한 표정을 지었기 때문에 '아겔라토스(ἀγέλαστος: 우울한, 음산한)'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고 한다.] 또한 친척 [[루키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]]는 당대 최고의 웅변가로서 명성을 떨쳤다. 아버지 [[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(기원전 97년 집정관)|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]]는 기원전 97년 집정관을 역임한 뒤 먼 히스파니아 총독으로 부임해 루시타니아인들과의 전쟁을 치러 승리를 거둔 뒤 기원전 93년에 돌아와서 [[개선식]]을 거행했다. 기원전 90년 [[동맹시 전쟁]]이 발발했을 때 집정관 [[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(기원전 90년 집정관)|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]]의 [[레가투스(로마)|레가투스]]를 맡아 전장에서 활약했다. 기원전 89년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함께 감찰관에 선임되어 2달 안에 무기를 내려놓고 귀순한 모든 이탈리아인을 로마 시민으로 인정한다는 법안을 통과시켜 로마에 반기를 든 동맹시들의 명분을 약화시켰다. 기원전 97년 집정관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는 베눌레이아라는 여인과 결혼하여 세 아들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, 가이우스(또는 루키우스) 리키니우스 크라수스,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를 낳았는데, 이중 막내 마르쿠스가 이 문서의 주인공이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